


ORAS 미츠루, 델피니움: 내 마음을 알아 주세요.
매서운 바람이 어깨를 타고 흐른다. 그 바람에 흠칫 몸을 떨며 매고 있던 목도리를 다시 한 번 여맸다. 살살이꽃이 제 시야를 가리면서까지 꽃잎이 흩날리던 봄이 올 것을 기대하며 겨울을 버티는 것즈음은 익숙했다. 흐벅지게 투득투득 쓸려 내려 갈 것처럼 잿빛이 웅클거리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올 듯했다. 차고 시리게 내리는 비를 맞을 생각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서 보이는 너는 얼핏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그 앞에 있던 꽃은 푸른빛을 자아해 내고 있었다. 그뒤 보이는 꾹 다물린 입에서 보이는 단호함이 절로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 겨울인 탓에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던 발이 빠르게 달려 가고 있었다.
갈빛 머리의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 이 꽃은 본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차디찬 겨울날, 몇 년 전의. 그저 순수했던 내가. 뛰어 온 것 때문인지 심장의 박동이 주체할 리 없었다. 추운 날씨에도 몸에 열이 오름을 느꼈다.
“이 꽃은 델피니움이라고 해요.”
꽃말이 뭐였더라, 그것까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하하, 미안해요. 쓴 웃음을 지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는 끝까지 말이 없었고,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 꽃은 키우기가 어렵다고들 해요. 이제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 말라 죽을 테거든요.”
그랬다. 여름의 그 더위에 이기지 못 하는, 그런 나약한 꽃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리 이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계절이든 꿋꿋이 살아 있는 꽃이 좋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강함을 추구하는 꽃이 좋았다. 어느 덧 소녀와 함께한 시간이 꽤 지나고 있었따. 새하얗게 의미 없이, 시간은 타 들어 가고 있었다. 소녀는 알려 주어 고마워, 다음에 또 보자. 라는 한 마디와 미소를 내게 보이고선 뒤를 돌아 걸었다. 무슨 목적으로 이곳까지 온 것인진 모른다. 푸른 꽃은 바람에 의해 약간 기울어져 있었고, 소녀의 뒷모습은…….
소녀의 뒷모습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소녀는 그저 유유히 길을 걷고 있었다. 제가 보던 당신의 뒷모습은 그렇게 처져 있지 않았어요. 당신이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내 앞에서까지 그럴 수가 있나요? 머릿속의 사고회로가 뚝 끊긴 것처럼 억울함이 몰려 왔다. 소녀는 알지 못 했겠지만, 연이은 패배로 인해 짓밟힐 대로 짓밟힌 나였다. 하지만 그 끝에 남은 것은 그저 피폐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전, 당신에게 그렇게까지 짓밟힌 건가요? 내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던 건가요?
눈이 내렸다. 동시에 떨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눈물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얼음이 되어 버릴 것만 같은데, 그렇게 춥지는 않구나. 분명 내 마음도 이렇게나 시리니, 날씨 또한 마찬가지일 줄 알았는데.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태평하게 눈물방울은 떨어졌다. 야속하게, 나는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발갛게 부어 오를 두 눈을 생각하니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결국엔 누군가에게 들킬 눈물, 고개를 숙여 봤자…. 지금의 나는 마치,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이기지 못 해 져 버린 이 꽃과도 같아서.
지금 뜯어 버린다면 분명, 여름이 올 때 말라 죽지는 않겠죠. 그렇겠죠? 저기, 당신은 이 목소리가 들리나요? 내가, 지금 이 꽃을 어떻게 해서든 꺾어 내려고 해요. 그러니까, 그 전에. 당신에게 짓밟히기만 하였던 나를, 나의 마음을…… …….
"윤진, 새로 챔피언이 된 걸 축하해." 평소의 침착함은 온데간데 없고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윤진이 내 앞에 있다. "성호...... 너 괜찮은 거야?" 걱정하는 얼굴치곤 너무 밝은걸? 농담을 하고 싶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멈췄다. "기념하는 의미로 내 옛날 이야기를 좀 들려줄까 해." 갑자기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놀란걸까, 당황한 윤진이 동의했다. 윤진, 지금 넌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어. 아직 등록의 방은 열리지 않았거든.
"난 챔피언이 되기 전까진 데봉에서 버려진 아들이었어. 그건 너도 알고 있지? 내 위에는 형이 하나 있었고 형은 누구에게나 인정받았어. 윤진, 혹시 그런 기분을 알아? 아무런 노력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얻는 사람을 바라보는,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의 기분을...... 내가 그런 기분이었지. 허탈감, 공허감, 무기력함. 다신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야. 내가 형보다 잘하는게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포켓몬 승부였어. 그래서 챔피언에 도전하기로 했지.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사실 힘들긴 했어. 8개의 배지를 다 얻는데만 거의 반 년이 걸렸거든. 그래서 그럴 가치는 있었어. 챔피언리그에 도전하기 직전에 처음으로 데봉의 3층에 올라갈 수 있었거든. 감격적인 순간이었지." 내 이야기에 빠져드는 윤진을 보며 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윤진은 그저 과거를 회상하며 지은 미소라 생각하겠지만. "호연은 강철타입으로 이기기 어려운 곳이야. 더운 지방이고, 체육관 관장들이 쓰는 타입마저 강철의 약점이지. 하지만 그래서 내 포켓몬들은 더 단련될 수 있었어. 더욱이 내겐 키스톤과 메가스톤도 있었거든. 사천왕들을 차근차근 이겨나가고 챔피언의 방이 열렸을 때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지. 챔피언은 꽤 강한 사람이었어. 지금은 하나지방에서 드래곤 타입의 체육관 관장을 하고 계신다더군. 어쨌든 이겼으니까. 내가 챔피언이 되고 나서 난 데봉의 후계자가 되었어. 사람들은 형이 아닌 내 이름을 불렀고, 난 한순간에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지. 형의 존재는 점점 잊혀져가는 듯 했어. 하지만 난 계속 불안했지. 형의 욕심은 끝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형을 없애기로 했어." 윤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와, 꽤 보기 힘든 모습인걸. "간단해. 형한테 맹독을 썼거든. 사람한테도 맞을진 몰랐는데, 효과는 꽤 좋더라. 너도 기억하는 사건일텐데? 데봉의 전 후계자가 시체로 발견되다, 보라색 수국과 함께." 나는 윤진의 표정을 읽어보려 했다. 놀람과 당황, 실망스러움? 그렇겠지. 지금의 난 그가 알고있는 나와 다른 사람일테니까. "보라색 수국. 그것도 원래는 하얀색이었어. 하얀 수국의 꽃말은 '변심'이지. 아버지의 변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맹독때문에 보라색으로 변해버리더군." 아, 나도 모르는 사이 미소를 짓고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윤진의 얼굴엔 혐오감이 떠올라있었다. " 윤진, 정말 나를 이긴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 같아? 내가 그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해?" 윤진이 뭔가를 깨달은 듯하더니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호, 지금 그 말은 널 이긴 사람들을 네가 죽였다는 말인가?" "하하, 그렇지. 난 이 자리를 계속 유지해야하거든. 그래서 너만은 오지 않길 바랬는데. 널 죽이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넌 꽤 좋은 친구였거든." 윤진은 이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윤진, 그래봤자 도망칠 순 없어. 메타그로스, '맹독'."
다음 날, 포켓내비에선 윤진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호연뉴스 속보입니다! 루네시티 체육관 관장 윤진 씨가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옆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보라색 수국이 놓여있었으며, 그의 친구이자 챔피언 나성호 씨는 슬픔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어때, 윤진? 꽤 잘한 연기지?" 내 앞에 앉은 윤진의 환상에, 나는 말을 걸었다.
고요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차가운 얼음 꽃송이는 모든 색을 삼키며 모든 소리마저도 지워버려는 것 같았다. 소년은 지금 이 절경을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 신일 것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렇게 밖에 생각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태산을 소복이 뒤덮은 하양이란 순수하고 아름다움의 대표적인 색이니 보는 눈동자도 자신이 그 순수함에 물들여지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천천히, 천천히. 모든 색도 소리도 사라지고 사라지는 이 순간, 순간은 자연이 부리는 마법 같은 일이었다. 감상에 빠지며 그저 깜빡이던 속눈썹에 작은 눈송이가 날아와 앉았다. 금방 녹아드는 찬 기운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감은 소년은 다시 홀로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것을 직시했다. 소년은- 레드는 스스로 표정을 감추고 있으나 조금 쓸쓸해보였다.
“산 아래는 봄인가봐.”
“삐까아?”
리자몽의 자랑이기도 한 꼬리 불꽃은 보고 있기만 해도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그 가까이에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붙여 앉고는 작은 두 손을 내밀어 얼었던 몸을 녹이던 피카츄가 레드의 말을 듣곤 쫑긋 두 귀를 세웠다. 활활 타오르는 그 따뜻한 불꽃을 담아 일렁거리던 커다란 흑색 눈동자, 이내 그 시선이 자신의 트레이너에게로 향한다. 아주 예전부터 묵묵했던 그는 지금까지도 말이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행동과 뒷모습으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했었다. 몇 번을 봤을까, 그를 따라가게 된 이후 몇 십 아니 몇 백번을 봤을 저 뒷모습, 어쩐지 저 뒷모습을 보면 옛날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 떠오르는 옛날이란 최고의 트레이너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그날 어린 소년, 지금은 그때보다 어른에 한발자국 더 다가선 소년이지만 말이다.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악의 조직 로켓단은 레드의 활약으로 해산되었고 그는 이후 사천왕과 챔피언을 쓰러트려 전당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새로운 챔피언이 되었다. 하루에 챔피언이 두 번 바뀐 사례는 지금껏 없었다. 때문에 이 날의 일은 나중에 칸토우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까지 알려져 트레이너들 사이에 태초마을의 레드라고 하면 전설같이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더란다. 허나 레드는 챔피언으로서 리그를 지키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그가 향한 곳은 고향인 태초마을이 아닌 은빛 산, 바로 이곳이었다.
“피카츄, 산책갈래?”
“피~~까아~…….”
“그렇게 싫은 표정하지 말고. 이제 은빛 산의 추위도 적응되지 않았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지 피카츄는 귀여운 미간을 푹 구겼다. 반팔을 입고서 멀쩡히 이 강추위를 견디는 레드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샛노란 털을 가진 이 작은 쥐 포켓몬, 피카츄의 고향은 언제나 따사로운 햇볕이 나뭇잎 틈 사이로 내리쬐는 상록 숲인데, 이런 설산이라니……. 아무래도 익숙지도 않은 추위란 견디기 힘든 날씨일 것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이니 말이다. 오들오들 웅크리고 가엾게 떨어대며 몸을 녹여주는 불꽃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신에게 밀착하는 피카츄를 보며 리자몽은 피카츄가 혹여 자신의 꼬리 불꽃에 델라 꼬리를 들어올렸다.
“춥다면 품에 안아줄게, 이리와."
이런 날씨에 산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못마땅한 마음을 표정으로 말하는 피카츄가 보였다. 싫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싫은 것일까, 가만히 피카츄와 눈을 맞추던 레드는 허리춤의 몬스터 볼을 모두 제 손에 올렸다. 볼에 들어가면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지기 때문에 「포켓몬스터」라고 한다고 했던가. 반투명한 구체안에 움직이는 포켓몬들의 인영은, 모두가 전설이라고 말하는 레드의 포켓몬들이었다.
"리자몽, 피카츄와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모두의 몸을 녹여줘.”
레드가 다른 포켓몬들을 몬스터 볼에서 꺼내자 빛과 함께 나온 포켓몬들이 나왔다. 커다란 포켓몬들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네 마리 씩나 튀어나오니 조용하고 넓다고 생각한 동굴이 금방 꽉 들어찬다. 잠만보, 거북왕, 이상해꽃 그리고 라프라스. 그들은 몬스터 볼에서 나와 땅바닥에 착지하기 무섭게 후다닥 리자몽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제는 집이랄 수 있는 이 동굴에 언제나 피어놓는 장작불이 눈에 익어있을 텐데도 제일 따뜻한 것은 리자몽이라는 듯 엄마에게 매달리는 아이처럼 그의 몸에 엉겨 붙으니, 이제 모두 최종진화를 하여 덩치가 커졌다고 해도 귀여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니 하는 수 없이 피카츄가 트레이너의 고집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작은 발과 손으로 땅을 내딛어 달려가 그의 품에 쏙 들어간다. 다른 포켓몬들에 비해 작긴 했지만 제법 무게가 있는 피카츄를 레드는 가볍게 들어 올리곤 겉옷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 겉옷은 얇긴 해도 그 안에 서로의 온기와 온기는 닿을 것이라, 그의 체온 덕에 몸이 따뜻해졌는지 피카츄는 아주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살랑살랑 좋은 기분이 흔드는 꼬리가 레드를 간지럽혔다. 그런 피카츄를 레드는 품에 더 끌어 안아주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삐?”
“여긴 언제나 겨울이니까.”
레드 그가 이 장소를 떠나지 않는 것은 마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흘러가는 시간, 그 시간을 타고 모두가 바뀌어가지만 그는 자신만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가장 강하기 때문에 해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기에, 레드는 챔피언이었다. 누구도 그를 뛰어넘지 못해 좌절을 하고 돌아선다. 이긴다는 것이 썩 기분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정상에 오르고 나서 알게 된 일이다. 레드에게 있어 이곳은 정상이자 동시에 절벽이다. 성장하는 즐거움은 더 이상 없었다. 막다른 절벽에 몰린 챔피언은 봄이 찾아오지 않는 이 설산의 정상과 닮아있었다. 스스로의 강함에 허무함을 느끼고 있으며, 쓸쓸한 얼굴이란 나아갈 수 있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표정이다.
흰색일색인 은빛이라고 해도 꼭 눈만이 있는 것도 어니고 하얀 색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절경에 피는 꽃도 있었는데, 유독 그중 자주 보이는 것은 레드의 이름과 같은 색인 동백이었다. 저 붉은 색은 겨울에 피는 꽃이라, 무참하게 목이 떨어지는 꽃이지만 그 겹겹 고운 꽃잎과 노오란 꽃술은 고고하여 모양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곳은 겨울이니 계속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 그린이 닮았다고 했던가.”
레드가 떨어진 꽃을 손에 쥐니. 친구인 그린이 일전에 자신과 이 꽃이 닮았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린이야 색이나 분위기가 닮아 그리 말을 했겠지만 레드도 자신과 닮은 꽃이라 동의하는 바였다. 어여쁜 꽃이라 향을 맡아보아도 향이 없는 꽃이라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지만, 이 붉은 색도 은빛의 겨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인 것도 확실히 비슷했다. 자신과 같이 말이다.
‘이곳에 봄은 오지 않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저 손을 콱 움켜쥐자 동백은 바스러져 붉은 색이 떨어졌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무대를 중앙을 비췄다. 비치는 재질의 머플러를 걸친 하얀 모자의 남자가 오른손을 들고 딱, 손가락을 튕기자 수면에서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며 우아한 몸짓으로 밀로틱이 떠올랐다.
"꺄아악! 윤진님!"
"오늘도 아름다우세요!"
"윤진님! 밀로틱!"
팬들의 함성에 손을 들어보이고 곁으로 다가온 밀로틱의 턱을 어루만진다. 호연의 콘테스트 마스터이자 루네의 체육관 관장인 윤진은 오늘도 팬들의 호응을 받으며 콘테스트 오프닝 이벤트를 끝마쳤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지친 얼굴로 소파에 앉자 데굴레오가 고개를 갸웃이며 다가왔다. 작은 아이를 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 쓰다듬으며 틀은 TV에서는 지난번 체육관전이 방영되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물타입 포켓몬의 배틀. 하나같이 강하고 아름다운 포켓몬들의 배틀을 보며 흡족하게 웃자 무릎위의 데굴레오가 덩달아 따라 웃었다.
어느 팬이 보내온 꽃이 꽂힌 화병을 바라보던 윤진은 저도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렸다.
새하얀 작약 꽃. 꽃말이 수줍음이랬던가.
속을 꼭꼭 감춘 하얀 봉오리가 조금씩 열린다. 파비코와 파비코리의 날개처럼 하얗고 비나방의 날개처럼 얇은 무수히 많은 꽃잎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꼭 저를 보는듯 하다. 그 팬이 무슨 생각으로 꽃을 보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그를 닮은 꽃을 보내왔다.
단단했던 꽃봉오리가 몇년전의 자신이었다면, 활짝 만개한 모습은 지금의 자신이 아닐까.
현재의 화려한 자신을 아는 팬들은 모르겠지만 몇년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수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상대방을 돋보이고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게 할 수 있는 역할.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는 파트너인 밀로틱과 함께 화려하게 피어나는것이 당연하다 생각되었다.
하얗고 풍성한 아름다움. 누가 보아도 화려하고 우아하며 순결한 저 작약처럼 화려하게 피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소중한 파트너 포켓몬들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널리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콘테스트도, 체육관 관장의 일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아름답고 우아한 나. 현재의 아름다움에 만족해 더욱 풍성한 꽃만을 피워내려 한다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저 화려한 꽃은 금세 꺾여버릴것이다.
강인한 힘과 지성의 줄기로 아름다움이라는 꽃을 지탱해 아름다운 물의 일루전을 보여줄것이다.
상대방의 강함을 배워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것이 가장 중요할것이다.
수줍음이 가득한 봉오리가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탐스럽고 아름다운 화려함.
다음 콘테스트의 테마는 흰 작약을 모티브로 흰안개를 이용해 볼까. 밀로틱과 사랑동이의 사랑스러움을 충분히 보여주기에는 약하겠지만 그 부분은 자신이 서포트 하면 되는 일이다. 콘테스트도 배틀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대형 수조에서 헤엄치는 사랑동이와 왕콘치, 메깅.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씨레오. 그리고 시원한 그늘에서 몸을 말고 잠들어있는 밀로틱.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 아이들을 화려하게 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맞는 스테이지와, 컨디션을 맞춰야 할 것이다. 콘테스트에서도 배틀에서도 아름답게. 누가 무어라 해도,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것은 바로 이 나와 나의 포켓몬들.
만개한 꽃을 더욱 많은 이들에게 내보이자. 화려하게 피어난 우리들의 모습을 더욱 많은 이들에게 보이자.
더 위를 향하여
"에레키블, 전광석화"
노란빚의 잔상이 남을 만큼 빠르데 에레키블이 날쌩마의 앞에 나타났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막거나 맞거나의 차이일 뿐이다.
다이아가 황급히 외쳤다.
"두발차기로 막아!"
Writen by.Hell0
권투선수들의 주먹이 맞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귀가 먹먹하리 만치 크게 터져나왔다.
두포켓몬 모두 위태로이 흔들렸다.
전진은 흘깃,체육관을 장식하고 있는 빌베르기아를 흘겨보았다.
「요즘 재밌는 신참이 있다던데?
엄청난 속도로 뱃지를 쓴다나 뭐라나--
니네 체육관에도 갈테니까 아마 만족스러울껄?」
저 식물을 건내며 대엽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아니,어쩌면 오히려 차고 넘쳤다.
너무 간만에 느끼는 위기인데도 기쁠 지경이다.
"전원이 나가있던 게 아쉬울 정도인데..."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다이아는 듣지 못한 듯 마저 지시를 내렸다.
"날쌩마,화염방사!"
아까의 충돌로 양쪽다 뒤로 물러난 만큼,장거리 기술을 쓸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대처가 생각보다 빨랐다.
"칫,에레키블 불꽃펀치로 뚫고 들어가!"
위태위태한 쪽이 더 스릴이 넘치기에 좋다.
어느쪽으로 피하려든다면 '화상'에 빠질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오히려 꿰뚫고 지나가겠다.
저쪽에서 불꽃으로 나와준다면 기꺼이 나또한 불꽃으로 맞부딪혀 줘야지.
얼음으로 나왔다는 얼음이 녹은 물이 순식간에 수증기가 되어버릴거다.
불꽃을 뚫고 튀어나온 에레키블을 맞이한 것은 날쌩마의 기가임팩트였다.
콰아앙---!!
굉음과 동시에 에레키블이 벽에 꽂혔다.
전진의 마지막 포켓몬이었던 에레키블이 버티려했으나 이내 쓰러졌다.
하지만 전진의 표정은 딱히 어둡거나 침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식을 한 듯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삐이익---
요란스레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에레키블,전투 불가능!따라서 도전자,다이아 승!"
청색의 깃발이 올라감과 동시에 다이아는 날쌩마를 끌어안았다.
그런 다이아를 향해 전진은 다가가서 뱃지를 건냈다.
"비컨뱃지다,다이아."
손을 내밀어 뱃지를 받으려는 다이아의 손에 뱃지를 쥐어주고선 전진은 다이아의 앞에 쭈그려 앉아서 질문을 했다.
"너,이번 리그에 참가 할거냐?"
"네?네!당연하죠!"
전진은 그에 웃으며 말했다.
마치 몇년은 본 친구인것 마냥 다이아의 등을 가볍게 툭툭 치면서 말이다.
"너같이 강한 트레이너는 꽤나 오랜만이거든-
불타올랐다고,나도 말이야.조금은 진심이었을지도?"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사람치고는 활발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다이아는 눈을 끔뻑거리며 갭에 적을 못했음을 드러냈다.
"그래서,이번 리그에는 나도 참가할 예정이니까.
반드시 더 강해져서 오도록 해.
기껏 맘에 들어서 참가했는 데,더 약해져 있으면 재미었으니까."
"...네.다음 번에는 전진씨에게서 압승을 거둬드리도록 할께요."
"오-좋아.사내자식이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잠시간의 대화가 조금 더 오간 후에야 다이아가 날쌩마를 돌려보내고서 체육관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공손하게 인사하고선 나가는 다이아를 소리없이 바라보던 전진은 다이아가 완전히 나가자 마자 몸을 돌려 포켓기어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에서는 연결음만이 계속해서 울릴뿐,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에 전진은 시원스레 웃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네 말대로 만족스러운 시합이었어.
전진이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대엽이 건내준 식물로 다가갔다.
받았던 3주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꽃이 지금에서야 수줍게 고개를 내밀곤 있었다.
『아직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이 꽃이 폈을 즈음에는 꽃말대로 네녀석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대엽이 건내주며 했던 말을 되새기며 꽃을 툭툭건든다.
"뭐,행운의 꽃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천왕이 될 생각이 없기에 참전하지 않았던 리그.
참전해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한동안 멈춰서서, 퇴보했을 지도 모르는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할 이유가 말이다.
자신의 이름따라 전진하기로 했다.
더 위를 향하여.
BW2 체렌, 칸나: 행복한 종말.
지독하게도 밝은 하늘이었다. 어제 왔던 그 거센 비는 이미 모습을 감추었고, 흙도 다시 짙은 고동빛에서 밝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거짓말처럼 쨍한 하늘에 미간을 찌푸렸다. 적당한 비가 좋았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비를 바라보면서 음악을 듣는 것은 꽤 본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 물론 어제 내내 내려 왔던 비는 썩 자신이 좋아할 만큼 적당하지만은 않았지만. 무엇보다 거센 비는 무엇을 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집중할 수 없게만 만들 뿐이기도 하고.
거의 2 년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그렇게나 거센 비가 오지 않았었다. 몸을 깊숙하게 소파에 묻고서는 창문 밖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2 년 전에는 그 비가 오는 하늘을 보면서 그만큼이나 크게 울었던 적이 있었던가. 질릴 정도로 흐느꼈었다.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대한자책감이 쏟아 나와서 그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너무나도 어리석었고, 그저 한 목표를 위해서 노력했음을 안다. 그 목표가 어디까지고 단순하고, 우매하였던 점이 문제였었지. 엉덩이를 쭉 빼 앉았다. 팔을 위로 뻗고서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은 그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색도 그러했다.
마치 그 옛날의 나처럼.
“왜 그땐 뒤늦게서야 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 버린 건지.”
늦어도 너무 늦었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은 채 나는 자신을 못 박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역부족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집어넣고, 필요 없다면 그 즉시 내뱉어 버리던. 기우뚱한 햇살이 창 안으로 스며들어오며, 그 여유를 만끽하는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지금의 나는 교사이며, 한 체육관의 관장이다. 그 과거로써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어둠을 밀어 낼 만큼의 빛은 끝자락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모험을 떠났던 셋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빛을 쥐었던 나였지만.
모든 것은 순탄하게 돌아갔고, 난 이 자리에 섰다. 팔을 내려 놓고서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려지는 과거의 모습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한 종극이 있더라면 그것으로 좋다. 붉게 물들어 활짝 피어 있는 꽃이 그것을 이야기해 주듯. 그 꽃은 나에게 있어서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있는 나 자신의 증표라고 할 수 있었다. 병에 곱게 담긴 채 만연의 아름다움을 자아해 내는.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고역의 끝에 맞선 나는 이 결과에 만족했으며, 더 이상 변하지 않고 그저 발전해 가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보았음 했다. 2 년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다시 2 년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이제 이 이상은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거야, 이제부턴 그 승부 안에서도. 끝끝내 남다가 결국 사그라들은 열기 속에서도 버티고 있는 내가 있을 테니까. 줄곧 나보다 더 전진해 있었던 너를 이 이상 질투하지 않아. 더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너와의 거리를 넓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승부에서 이겨 얄궂은 미소를 보이는 것은 언제까지고 너였지만. 이제부터는, 그것을 보고도 억울해하지 않아도 좋아. 너는 강하고, 나는 그저 그 뒤를 이을 뿐이야. … 굳이 너를 쫓을 생각은 하지 않을게.
왜냐하면, 그러한 마음이 없다 해도.
나를 기다리는 것은 분명 행복한 종말일 테니까.
여행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풋풋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마냥 재능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자신만만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목소리는 크고 당돌했다. 승패에 상관없이 내일을 기약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그가 죽단화 덤불 앞에서 이런 표정을 하고 주저앉아있을거라고는 예상한 적 조차 없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는 무릎을 감싸던 손을 풀었다. 슬픔이 묻어있는 얼굴빛이 거두어지고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슬쩍 웃으며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나를 알아본 듯 표정이 누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입가에 사뭇 사회적인 웃음이 걸려있는 채 몸을 일으켜 악수를 건네는 그였다. 손을 붙들고 잘 지냈냐, 는 인사를 건네기에는 어려웠다. 물을 오래 머금고 있던 종이컵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는 것 처럼, 슬픔을 가두고 있으나 어디선가 감정은 흘러나오고 있는게 느껴졌다. 첫 인사는, 왜 표정이 그래요? 라는 말을 건넬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망가지는 모습을 타인에게 지독하게도 보이기 싫어하는 그라는 것을 알았으나 비애를 견디고 있는 그에겐 이 말이 더 예의일 성 싶었다.
그는 별 것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시선을 죽단화 앞으로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라고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는 잠시 휴지를 놓다 무언의 결심을 한 듯, 입을 벙긋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말했었죠. 예전에 싸워본 윈디와 다시 한번 붙어봤으면 좋겠다, 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옅은 한숨과 입꼬리 한쪽이 일그러지는 그의 말이 쏟아졌다. 미안해요, 이젠 그럴 수 없겠네요. 연유를 물어보자, 그는 쓰게 웃기만 했다. 지금은 얘기하기 힘들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나는 그의 눈을 보면서 두어번 끄덕였다. 그는 작게 고맙다, 고 중얼거리며 눈앞에 피어있는 죽단화에 손을 뻗었다. 한 가지를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어 뚝 소리가 나도록 꺾었다. 덤불이 크게 흔들리며 꽃들도 함께 일렁였다. 그는 죽단화 꽃자루를 뜯어 꽃송이들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것을 그리움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 참 좋았어요. 윈디는 가끔 허공을 멍하게 보고있는 때가 있었거든요. 사람처럼. 혼자 사색할 시간이 필요했나봐요. 그럼 옆에 앉아서 같이 허공을 차는 시선을 보내다가, 한번씩 윈디를 쳐다보곤 했었죠. 몇번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나를 보고 씨익 웃었어요. 크게. 그러면 덩달아 함께 웃으면서 한번 쓰다듬어주는거죠.
포켓몬의 사색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 그가 한편으로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본 그에게선 과거의 방자함의 자리에 세심한 감정들이 새로이 들어차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더이상 돌아오라, 고 말할 수가 없는게... 잘해줬다, 고 말해줄 수가 없는게... 아, 미안해요. 쓸데없는 얘기가 너무 길었죠. 당신은 만나본 적이 있으니 저도 모르게 그만.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나 입꼬리가 파드득 떨렸음을 잡아낼 수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다며 사과를 한 그는 손바닥을 얼굴로 가까이하며 색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 옆모습에서 깊은 그리움의 우물이 범람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과 꼭 닮은 색을 바라보고 이런 위로를 건네는게 고작이었다.
예쁜 주황색이었네요.
그렇죠? 눈부신 색이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며 그는 웃었다. 축축한 음성과 눈가를 두 손에 묻어버리는 그가 있었다. 몇장의 꽃잎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팔랑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들판에는 개양귀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산마루 아래 눈이 닿는 곳까지, 군데군데에 점점이. 가냘픈 듯 연약해 보이는 긴 꽃줄기를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지만 그러나 결코 꺾이거나 눕지는 않는다. 그저 무상하게 바람에 천천히, 그리고 때로는 강하게 흔들릴 뿐이다. 일부러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찾아온 전 챔피언은 나지막이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선다. 다리를 굽히며 그는 생각한다. 녀석과 함께 들판을 건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다, 마치 바로 어제의 일인 양. 조용히 피어 있는 꽃들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변했지.
노간주는 손바닥을 펴 바라본다. 마르고 잔주름이 잡혀 있는 손바닥.
주먹을 쥐자 튀어나와 있는 뼈마디 위로 핏줄이 솟는다. 아직 앙상하지는 않지만 자신은 늙어가고 있었다.
몬스터볼을 쥐듯 둥글게 손 모양을 만들어 본다. 텅 빈 손가락 사이의 공간으로 무심하게 바람이 지나간다. 노간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본다. ……지금은 그 위에 있는 것이더냐. 조그맣게 중얼거려 본다. 혼자 작게 읊조린 목소리는 바람 소리에 지워져 사라진다.
노간주는 너그러운 비탈에 등을 기대어 누웠다. 조각 구름이 떠 가는 하늘이 짐짓 평화로워 보인다. 하늘을 향해 뻗은 개양귀비 가느다란 꽃대가 미풍에 흔들리며 춤을 춘다. 이곳에서부터 저곳까지 곳곳에 선으로, 점으로, 붉은 색들이 수놓아져 있다. 노간주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떠오를 것만 같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건만…… 어째서 그렇게도 생생하고, 또 아름다운 것인지……. 개양귀비꽃 핀 들판은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녀석은 아름답게. 고고한 날갯짓을 한다.
노간주는 기쁜 듯 자신의 포켓몬을 올려다본다. 몬스터볼을 쥔 손에는 주름살이 없다.
"가자, 불카모스."
젊은 노간주는 불카모스와 함께 들판을 건넌다. 태양을 닮은 여섯 장의 날개는 개양귀비 꽃과 같은 선명한 붉은 색을 내고 있다. 불카모스의 하늘거리는 날갯짓과 바람에 흔들리는 개양귀비 꽃. 움직임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세계는 느리게 움직인다. 하늘 아래 눈부시게 흩어지는 태양 빛을 받으며 둘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노간주는 눈을 뜬다.
몸은 늙었을지언정 피부로 와 닿는 바람의 느낌은 여전하다. 흔들리는 공기와 함께 산들거리는 개양귀비 꽃대. 조금 있던 구름마저도 어느 새 걷힌 하늘. 풍경은 어쩌면 같다. 옛 기억 속에 남겨진 영상을 바람에 겹쳐 읽는다. 그러다 혹 쓸쓸해질까 두려워, 눈물이 나기 전에 먼저 웃는다.
그래,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저.
조금, 빈 자리가 있다는 것뿐.
노간주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옷을 털자 마른 풀잎 부스러기들이 오소소 떨어져 내린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깊게 호흡을 한다. 음, 하고. 목에 길게 이어 두른 몬스터볼 몇 개를 만지작거린다. 마디마다 주름이 깊에 패인 손으로 몬스터볼 중 하나를 골라 손에 쥔다. 얇은 피부로 전해지는 익숙한 감각을 느낀다. 그는 가운데의 버튼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초연히. 그는 안의 포켓몬을 불러낸다. 순간의 눈부신 빛이 일어난다.
노간주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포켓몬을 올려다본다. 개양귀비 꽃처럼, 태양처럼 붉디붉은 여섯 장의 날개. 불카모스는 제자리에서 고고히 날갯짓하며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아아, 그래.
괜히 눈물이 날까 살짝 눈을 감는다.
보이느냐?
……우리는 이곳에 있단다.
바람만이 길어진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노간주는 눈을 뜨고 무심히 수염을 쓸어 내린다.
"불카모스, 가자꾸나."
그리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개양귀비 꽃이 핀 들판을 뒤로하고 노인과 그의 포켓몬은 언덕을 내려간다. 꽃들은 내려가는 길에도 점점이 붉게 피어 있다.
멍하니 있다 깊은 생각에 빠질 즈음 첫 여행의 시작을 떠올리곤 한다. 두근거림에 잠을 설쳐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도 못했었고 그 무엇보다도 포켓몬 볼이 들어있는 상자를 열 때의 긴장감과 두근거림은 아직도 그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손끝에서 느껴진다. 각자의 포켓몬을 선택한 뒤, 짧은 베틀을 하고 박사님을 만나러 가는 길도 모험을 위해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도 다시 생각해도 여전히 두근거린다.
길면서도 짧은듯한 모험은 막을 내렸고 같이 함께한 친구들은 각자의 길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직 돌아갈 수 없다. 도감은 아직 미완성 단계인 것도 있지만 조금 더 멀리 이 지방의 곳곳을 둘러보고 싶어. 다양한 포켓몬들도 만나고 박사님의 말처럼 색이 다른 보기 힘들다던 포켓몬들도 많이 보고 싶다. 그리고 조금 더- 전설로만 내려오던 다른 포켓몬들도 조금 더 만나고 싶다. 아직 이 모험을 끝내기에는 무언가가 많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제크로무. 조금 더 여행해도 괜찮겠지?"
나의 질문에 빤히 쳐다보는 제크로무였다. 사람의 언어로 대답할 일은 없겠지만, 저 눈빛은 마치 원하는 데로 하라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그 눈빛은 뭐야- 라고 짧은 불평을 내뱉으려는 순간 눈을 감고 나에게로 고개를 숙여오는 제크로무였다. "내 생각에 동의하는 거야?"라는 물음에 감고 있던 눈을 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제크로무였다. 그래- 선택은 내 몫이니까.
"고마워. 길고 긴 여행이 될지도 몰라."
제크로무의 이마에 손을 올려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고 나쁘지 않다는 듯이 쓰다듬을 받아주는 제크로무였다.
도감을 완성했다. 낮은 확률로 나온다는 색이 다른 포켓몬들도 열심히 보러 다녔고, 그만큼 포켓몬 센터를 찾는 일도 많아졌었다. 치료를 받고 같이 여행하는 포켓몬들에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며 나무 열매를 주면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그런 아이들이었다.
박사님에게 완성된 포켓몬 도감을 건넸다. "이제 무엇을 할 예정이니 토우코?"라는 질문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하러 다닐 거에요."라는 짧은 대답을 내뱉었다. 출발하기 하루 전날, 마지막으로 집에 들러 엄마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다른 지방으로 여행 가려고?"
"네. 좀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싶어요."
다른 지방들은 어떤 모습일까, 이곳과는 많이 다를까? 다른 포켓몬들도 많이 있겠지? 라며 꿈에 부풀어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쏟아내었다. 잠잠히 듣고 있던 엄마는 "잘 다녀오렴. 종종 편지로라도 연락하고."라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날 밤에도 여행의 첫날처럼 잠에 빠져들지를 못했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면서 어떻게든 잠에 빠져들려고 노력했지만 또 다른 여행의 시작으로 가득 찬 두근거림 때문에 오늘도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그럼 조심히 잘 다녀올게요. 종종 편지 보낼게요."
잘 다녀오겠다며 커다란 목소리로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짧은 포옹한 뒤 제크로무의 등 뒤에 올라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하늘 위를 날아올랐다. 드디어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꿈꿔왔던 다른 것들을 이룰 기회가 찾아온 거나 다름이 없어. 이 여행의 끝은 과연 어떻게 막을 내릴까?
어느 한 지방, 바닷가 근처에 있는 마을에 다양한 물건을 판다는 곳이 있어 천천히 그곳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여러 가지 종류의 도구나 물건들이 판매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수많은 물건 사이로 꽃들로 가득 채워진 꽃집에 눈이 들어와 천천히 그곳을 둘러보았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꽃집 주인이 "트레이너?"라는 짧은 질문에 여행 중이라는 짧은 대답을 하고 더 둘러보고 있을 때.
"트레이너 아가씨한테 어울릴 거 같아서. 금매화라는 꽃이야."
받은 그 꽃다발은 황금색을 띄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꽃이었다. 가만히 그 꽃을 보고 있으니 이 여행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마지막에는 내가 꿈꿔왔던 것처럼 꿈으로 가득 찬 그런 끝 일 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신인 트레이너, 처음 포켓몬을 잡는데 살짝 불안함 감도 있었지만 소녀는 무사히 새로운 포켓몬을 잡을 수 있었다. 마농 그녀의 새로운 친구는 ‘플라베베’라는 페어리 타입의 포켓몬으로, 꽃이 많은 칼로스 지방에서는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아이였으나 마농은 쉽게 볼 수 있든 아니든 간에 하리마론인 하리 씨나 알랭이나 알랭의 리자돈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또 다른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저 기쁜 모양이다. 트레이너가 되기 전에 자신은 어떤 모험을 할까, 어떤 친구를 만날까 수많은 상상을 했었지만, 그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사귄다는 꿈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플라 쨩의 꽃은 노란 색이구나~ 노란 색을 좋아하는 거야?”
도감에 의하면 마음에 드는 꽃을 발견하면 그 꽃과 평생을 함께한다는 포켓몬이다. 꽃이어도 보통 꽃과 다른 ‘요정의 꽃’이라는 꽃이지만 말이다.
“아! 나도 노란색 좋아해! 봐봐, 스카프도 노란색인걸. 플라 쨩의 꽃처럼 예쁜 샛노란 색이야.”
“?”
자신의 스카프를 가리키며 배시시 웃는 마농을 보고 플라베베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아직은 어색한 것일까. 몬스터 볼에 잡혀 그녀의 친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마농을 잘 모르니 그건 당연했다. 허나 마농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모나지도 않고 둥글둥글한 성격이 그녀의 느긋함의 이유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앞으로 계속 함께할 시간이 이 벌어져있는 관계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고민 따위는 털털 털어버리고 마농은 플라베베의 옆에 착 달라붙어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푸르른 하늘에 파란색, 하얀색 등 색색의 꽃을 탄 플라베베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이 보이니, 소녀의 눈은 또 반짝였다.
“저기, 저기! 플라베베들이야! 플라 쨩의 친구들일지도 몰라, 안녕~!!”
마농에게 잡히기 전까지 야생에서 살았던 플라베베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이 세계가 인간과 포켓몬이 공존하는 세계라지만 야생 포켓몬들에게는 사람들은 모르는 야생 포켓몬만의 세계가 있기 마련이라, 그 밖의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만나지 않을 존재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플라베베가 그렇게 난생 처음 눈을 마주한 사람, 마농은 정말 순수한 아이였다. 사랑을 베풀 줄 알기에 누구나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본인은 전혀 눈치 채고 있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 소녀는 분명 타인 그리고 모습이 다른 존재마저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화려한 힘은 아니지만 그녀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포켓몬들만이 알 것이다. 마치 태양과 같다고, 이 소녀는 너무나도 눈부신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나도 플라 쨩처럼 꽃을 타고 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자신도 메가 진화를 하고 싶다드니 가끔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이런 점 또한 이 소녀의 매력이라고 하겠다. 작은 눈동자가 깜빡였다. 마농을 뚫어져라 가만히 보고 있던 플라베베는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근처 수풀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다. 안에서 무엇을 찾는 듯 했다. 정말 동화속의 요정처럼 10cm밖에 되지 않는 작디작은 몸으로 끙끙거리며 당기는 듯 보이고 있으니 마농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여 플라베베가 들어간 수풀 앞을 기웃거렸다.
“플라 쨩?”
힘겹게 수풀에서 쏙 머리를 뺀 플라베베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다홍색 꽃이었다. 플라베베가 작기도 많이 작다보니, 쥐고 있는 모양을 보면 꼭 부케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가 쥐고 있는 꽃은 바로 ‘꽃기린’이라고 불리는 꽃이었다. 기린처럼 목을 길게 뺀 것 같아 붙은 이름이라고 하는데, 일 년 내내 피는 꽃이지만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은 아니기 때문에 모습도 이름도 생소하게 느낄 사람이 많다.
“응, 꽃……?”
“베베.”
플라베베는 마농의 귓가로 날아가 그녀의 귀에 꽃을 꽂아주었다. 마농의 머리카락도 이 꽃과 같은 다홍빛이기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살짝 코끝에 닿는 꽃향기에 부끄러운 지 마농은 얼굴을 붉혔다. 분명 마농 그녀가 꽃을 타고 날아가고 싶다고 했던 그 말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꽃 선물을 주며 다가와준 플라베베, 플라 쨩을 보노라면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예쁘다고, 말하는 걸까아……. 고마워, 플라 쨩.”
언어가 달라 말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붉고 작은 꽃은 마농과 잘 어울렸다. 그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왠지 저 하늘 위를 날고 있지 않음에도 플라베베 또한 나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지우와 오빠의 배틀을 구경했다.
연습 배틀 이라지만 지우의 피카츄와 오빠의 파르빗이 트레이너의 지시에 따라 달리고 기술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자랑하는 것 같아 얄밉다.
기분전환을 한다며 지우와 피카츄가 밤늦게 돌아다녀도, 파자마로 갈아입은 세레나가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밤바람을 쐬어도 괜찮은 것은,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은 포켓몬이 있기 때문. 아직 어리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포켓몬들과 함께 생활하는 지우나 세레나, 그리고 오빠가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파트너 포켓몬이 가지고 싶어. 자신의 의사를 우선시 하고,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껴주는 파트너가.
유리카는 시무룩한 얼굴로 비스듬히 멘 포셰트를 끌어다 무릎위에 올려두자 데덴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우울해 하는 마음을 아는지 고개를 갸웃인 데덴네가 쪼르르 팔을 타고 올라와 볼을 비볐다. 위로를 하려는 건지 친밀함을 나타내는 행동에 마음이 조금 풀리려다가도 데덴네 역시 오빠의 포켓몬이라는 것이 생각나 흥, 유리카는 고개를 홱 돌렸다. 데덴네는 나중에 포켓몬을 소지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받을 수 있도록 킵해두었고, 로켓단과 배틀을 하는 경우 데덴네에게 지시를 내리면 데덴네는 자신의 지시를 따랐지만 결국은 지금 자신의 포켓몬이 아닌 오빠가 맡아둔 미래의 자신의 포켓몬. 오빠가 불러들이면 만날 수 없는 친구.
데네-? 데덴네가 고개를 갸웃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어깨에서 뛰어내려 어디론가 가 버렸다. 어린 건 싫어. 우울한 얼굴로 무릎을 세워 모아 안고 입을 비죽였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 지우와 세레나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소중한 파트너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
어디론가 달려갔던 데덴네가 새하얀 꽃을 물고 돌아와 다리를 타고 무릎 위로 올라왔다. 유리카의 눈앞에 선 데덴네가 물고 온 꽃을 내밀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고 일부러 꽃을 가져온 데덴네의 마음이 고마워 유리카는 꽃을 받아들고 씩 웃어보였다. 오늘은 이만 잘래. 우울해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걸. 그래도 언젠가는, 온전히 자신이 돌보는 내 포켓몬을 가질 수 있을 거야.
데덴네를 꼭 껴안고 일어난 유리카가 셀러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뒤척여도 우울한 마음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자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나쁜 생각은 안돼! 유리카는 언제나 활기차야 하는걸. 억지로 자려고 하니 더 잠이 오지 않아. 조금만 걷자. 근처라면 오빠나 세레나를 깨우거나 포켓몬과 함께 가지 않아도 될 거야.
세레나와 데덴네가 깨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 셀러 텐트에서 나오자 모닥불 근처에서 잠들어 있던 피카츄가 귀를 쫑긋였다. 쉬잇!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자 피카츄가 고개를 갸웃이더니 일어났다. 따라오려는 모습에 고개를 젓고 하얀 이를 드러내 웃어보이자 여전히 고개는 갸웃이지만 따라오지는 않는 것을 확인하고 유리카는 마음 편히 길을 걸었다. 너무 멀리 가지 않으면 괜찮을거야. 낮에 봐두었던 풀밭을 목적지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무와 수풀 사이를 지나오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하얀 꽃이 듬성듬성 피어있던 초록색 풀밭은 온데간데없고 무더기로 화려하게 피어난 노란 꽃들이 달빛 아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고 있었다.
노란 꽃이 자신을 닮았다며 세레나가 보여주었던 달맞이 꽃. 달님만을 기다리는 예쁜 꽃이라서 밤이 아니면 볼 수 없다던 꽃이 저희들끼리 웅성이고 있었다.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풍경에 활짝 웃고 꽃무더기에 몸을 던지자 진한 향기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가슴 위로 무언가 떨어져내려 놀란 눈으로 살펴보자 어딜 갔었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던 말랑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울었다.
말랑이.
오빠의 몬스터 볼이 아닌 언제나 자신의 포셰트에서 잠을 자는 소중한 친구. 어느 날 갑자기 마법처럼 찾아와 소원을 이루어 준 말랑이. 달맞이꽃이 달님을 기다렸다면, 나는 너를 기다렸어.
말랑아, 정말 좋아해!
그 어떤 말랑이라도 정말 좋으니까. 좀 더 알고 싶어! 어떤 때라도 곁에 있을게 언제나 잊지 말아줘. 그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항상 이 마음은 함께 하는 거야.
포켓몬스터 XY&Z 말랑이의 노래-中-